Woodges'woods

low-key life

무한자기회귀

[Andrew Bird & Fiona Apple:]
I don’t believe everything happens for a reason
To us romantics out here, that amounts to high treason
I don’t go in for your star-crossed lovers
In the heart of a skeptic
There’s a question that still hovers near

[Andrew Bird:]
For it begs the question
How did I ever find you
Now you got me writing love songs
With a common refrain like this one here, baby

[Fiona Apple:]
And all your left handed kisses
Were just prelude to another
Prelude to your backhanded love song, baby

[Andrew Bird:]
But it begs a question
How did I ever find you
Drifting gently through the gyre
Of the great Sargasso sea, Atlantic Ocean
Got me writing love songs
With a common refrain like this one here

[Fiona Apple:]
The point your song here misses
Is that if you really loved me
You’d risk more than a few 50 cent
Words in your backhanded love song

[Andrew Bird & Fiona Apple:]
For it begs the question
How did I ever find you
Drifting gently through the gyre
Of the great Sargasso sea, Atlantic Ocean

The point your song here misses
You got me writing love songs
Is that you really love me
With a common refrain like this one here, baby
Is prelude to another of your backhanded love songs

Now it’s time for a handsome little bookend
Now it’s time to tie up all the loose ends
Am I still a skeptic or did you make me a believer?
If you hesitate, you’ll hear the click of the receiver

누군가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서사에 나를 교묘히 이용하는 느낌이 들 때. 오인되거나 전유(Appropriate)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 ‘고명딸’이라는 말을 들었을때 그 고명처럼 얹어지는 ‘딸’이 느낄 기분 같은 것이 들 때. 그럴 때, 사랑은 마냥 달갑지만은 않다. 그러나 나 역시도, 그렇게 한다.

지금까지의 짧은 인생경험을 돌이켜보건대 사랑에 빠지는 일은 내가 만든 어떤 이야기 속에 상대방을 가두어 크나큰 오해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몇가지 단서를 통해 누군가가 바로 내가 찾던 사람이라고 성마르게 단정짓고 그 사람이야말로 트라우마, 자기연민, 그리고 약간은 뒤틀린 자기애로 버무려진 나의 서사를 ‘읽어내줌’으로써 구원할 사람이라고 투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에게 있어 사랑은 내가 나의 서사를 상연할 수 있는 상대, 말하자면 ‘진실하고 진정성있는 관객’을 찾는 일 같다. (그리고 동시에 그 관객은 수준급의 비평가여야 한다.)

상대도, 나도, 결국 모두가 사랑이라는 양자구도 속에서 계속해서 자기자신에게로 회귀하고 마는 것이다. 사랑이 주는 달콤함과 황홀함은 자기연민의 은밀한 쾌락, 자아도취의 열정을 내가 아닌 다른 인간이 대신 발화해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인간은 다른 사람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만을 사랑할 줄 알다가 죽는 것이 아닐까. 아담과 이브가 아니라 나르키소스야말로 ‘사랑하는 인간’의 원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끝도 없이 고독해진다.

하지만 오해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환상적인 서사의 장막이 걷힌 후 드러난 동상이몽의 두 사람은 서로를 당혹스럽게 쳐다본다. 상대를 단단히도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꽤나 고통스럽다. 구원자인줄 알았던 그 사람은 나의 서사에 내가 기대한 것만큼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그 역시도 마찬가지로 -아마도- 자신 나름의 드라마 속에서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거나, 그러한 서사 부여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유형의 사람이었을 수 있다. 이제 남은 것은 ‘탈사랑’의 과정이어야 할까? 그렇다면 사랑은 서로를 오해하는 동안에만 지속될 수 있다는 역설이 도출된다.

모두가 자신을 알아줄 하나의 관객을 기다리며 독백 대사를 주절거리고 있는 무명 배우와 같다. 그렇다면 내가 기꺼이 -크나큰 오해를 했지만 모종의 이유로 어쨌든 내 인생에 끌어들인- 그 사람의 진실한 관객이 되는 것은 어떤가. 그 관객은 오독하지 않기 위해 몇번이고 같은 텍스트를 읽는 주석학자, 실체적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판사와도 비슷한 태도를 지녔을 것이다. 상대를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으로 두고 쉽사리 나로 회귀하지 않기. 그리고 영원히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끊임없는 성실한 탐구의 자세를 지니는 것. 그것이 내가 상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의지이자 표현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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