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odges'woods

low-key life

사르트르, 지식인을 위한 변명

Plaidoyer Pour Les Intellectuels 

둘째 날 강연

지식인의 기능 -Ⅰ. 모순

p.74

(…) 지금 당장 보편주의적 관점을 취하는 이들은 우리에게 안도감을 줍니다. 왜냐하면 사이비 지식인에 의해서 보편적인 것이 이미 성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식인- 즉 불편함 속에서 자기 자신을 괴물로 파악하는 지식인-은 우리에게 불안감을 줍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인간이란 만들어나가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이비 지식인들이 게리 데이비스 운동에 열광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운동은 지금 곧바로 세계시민이 되는 일을 위한, 그리고 보편적인 평화가 지구를 다스리는 일을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어떤 베트남 사람이 이 운동에 참가하고 있던 프랑스 지식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 좋은 생각이네요. 그렇다면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은 베트남이니 그곳에 평화를 요구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사이비 지식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안 될 일이지요. 그렇게 되면 공산주의자에게 유리할 뿐이니까요.”

그는 일반적인 의미의 평화를 원했지, 결코 제국주의자에게 유리하거나 또는 식민지의 피지배 민중에게 유리한 평화를 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처럼 특수한 평화를 배제한 채 그저 보편적인 평화만을 원한다면, 사람들은 기껏해야 도덕적으로 전쟁을 비난하는 일에 그치게 됩니다. 그런데 미국의 존슨 대통령까지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 내가 이전의 강연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 지식인이란 전쟁을 그저 도덕적으로 비난하면서, 지금 이 순간 그 자신이 폭력이 난무하는 우리의 세계 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언젠가는 이상적인 평화 – 피억압자의 승리를 통해 모든 전쟁이 끝난 뒤에 세워질 인간의 새로운 질서가 아니라 차라리 하늘에서 내려온 평화에 대한 관념 – 가 통치하게 될 것이라고 꿈을 꾸는 도덕주의자요 이상주의자라고 여기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사이비 지식인의 태도 때문입니다. 진정한 지식인은 그 자신이 급진적이라는 점에서 자기가 도덕주의자도 아니요, 이상주의자도 아님을 압니다. 예를 들어 그는 베트남의 유효하면서도 유일한 평화는 눈물과 피의 값을 치러야 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 그 평화는 미군의 철수와 폭격의 중지에 의해서, 따라서 미국의 패배에 의해서 시작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가 지닌 모순의 본성 때문에 진정한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 속에 스스로 참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갈등은 모두가 다 – 그것이 계급 간의 갈등이든 또는 국가 간의 갈등이든 또는 인종 간의 갈등이든 상관없이 –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지배계급의 억압으로부터 비롯된 특수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진정한 지식인은 그 자신이 곧 피억압자임을 의식하고 있는 피억압자라는 점에서 결국 그 또한 피억압자의 편에 서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지식인의 이러한 입장이 과학적 입장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재차 강조해야 합니다. 진정한 지식인은 그가 기만으로부터 깨어나면서 가면을 벗겨내고 있는 미지의 대상에 차근차근 엄격한 방법을 적용합니다. 그는 이데올로기와 싸우면서, 또 이데올로기가 숨기고 변호하는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폭로라는 실천적인 작업을 수행합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지식인은, 아직은 아니지만 이제 그날이 오면 지식인이 사라지게 되리라는 것, 또 사람들이 자유를 마음대로 누리면서 그 어떤 모순도 느끼지 않은 채 실천적인 지식을 획득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롭고 평등해지며 형제처럼 될 그런 사회적 보편성이 언젠가는 가능해지도록 하기 위하여 일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으로서는, 단지 자신의 변증법적 엄밀함과 급진주의라는 길잡이만을 가진 상태에서 끊임없이 조사하고 또 실패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지식인의 기능 -Ⅱ. 지식인과 대중

p. 77

(…) 모든 사람은 자기 고유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데, 체계에 의해서 이 목표가 끊임없이 도난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소외는 지배계급에까지 확장되어서 나중에는 지배계급의 구성원들마저도 그들에게 속하지 않는 비인간적인 목표를 위하여, 즉 근본적으로 이익을 위하여 일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자기 고유의 모순이 결국에는 객관적인 모순의 특이한 표현임을 깨닫게 된 지식인은 이러한 모순에 맞서서 자기 자신과 타인을 위해 싸우는 모든 사람과 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 사실 그 이데올로기는 지식인 자신의 이데올로기입니다. 그것은 (실재적으로 그가 중간계급의 구성원인 한에 있어서) 그의 생활 양태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이면서 또한 그의 세계관으로, 즉 자신의 코에 걸어놓고 그것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는 안경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입니다. 지식인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순은 처음에는 단지 고통으로만 체험됩니다. 지식인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이 모순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가 모순에 대하여 자기 나름의 거리를 취할 수 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도움이 없다면 지식인은 이 거리를 취할 수 없습니다. 사실 상황에 의해서 철저하게 자신의 조건이 결정된 이 역사의 하수인은 고공의식에 정확하게 반대되는 것입니다.

(…) 만일 그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판단하기 위해 사회 바깥에 관념적으로 자리 잡으려고 시도한다면, 잘해봤자 그는 자신의 모순을 자기 자신과 함께 사회 바깥으로 가지고 나간 꼴이 되고 말 것이며, 잘못하면 중간계급 위에 군림하면서 그 거대한 부르주아지에 자신을 일치시키게 됨으로써 결국에는 아무런 이의 제기 없이 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지식인이 자신이 사는 사회를 이해하는 방법은 유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가장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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