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mo Levi, I sommersi e i salvati
Essay_
1. 들어가며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는 홀로코스트라는, 미증유의 비극으로부터 생환한 프리모 레비의 증언문학이다. “세계의 항문(anus mundi)”[1] 아우슈비츠 라거에서의 경험은 레비의 삶에 있어서 문학적, 사상적 원체험이었다. 1987년, 그의 죽음 전 마지막으로 쓰여진 이 책은 서문과 결론, 그리고 8개의 장으로 이루어져있다. 그가 라거 내에서 보고 듣고 겪은 경험들에 대한 기억과 그가 전 생애에 걸쳐 치열하게 맞서고 곱씹은 그에 대한 사유가 촘촘하게 직조되어 전개되고 있다.
작가는 책에서 우리에게 숱한 물음들을 던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윤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제기는 그의 책 전반을 관통하고 있다. 두 질문을 토대로 레비의 논의들을 재구성해보면서 8장의 장면장면들을 관통하고 있는 그의 통찰과 사유를 따라가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답하지 못한 미완의 과제를 이어받아 고투를 이어나가는 것은 홀로코스트라는 인류사적 원점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일 것이다.
2.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거에서 경험하고 목도한 참혹한 세계를 작가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기록한다. 이 기록에서 우리에게 무엇보다 충격을 주는 것은 강제수송열차에 실린 그 순간부터 라거 내에서 죽음을 맞이하거나 살아남아 해방을 맞이하기 전까지, 강제수송자들의 ‘존엄성’은 마치 인류에게 한번도 주어진 적이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망각되었다는 사실이다. 망각보다, 의도적인 유린이라고 해야 정확할 이 존엄성의 완전한 공백상태에서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일 수 없었다. 아우슈비츠로 가는 수송 기차는 몇 주간 지속될 수 있는 여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당국은 식량도, 물도, 나무 바닥을 덮을 깔개나 짚도, 생리현상을 해결할 용기도,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마련해주지 않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일련의 상황들은 그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SS호위대는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플랫폼이나 선로 중간에 아무데나 쭈그려 앉는 것을 보면서 즐기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지나가던 독일 사람들은 공공연하게 혐오감을 드러냈다. (…) 저들은 Menschen이 아니다, 짐승이다, 돼지들이다”(134면)
그들에게는 그저 하나의 유기체로서 생명을 부지하는 삶, 조에(zoe)만이 남은 것이다. (물론 그조차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이들로부터 ‘인간임’을 뺏는 것이 나치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나치가 명백히 의도했다고 할 수 있는 이 ‘탈인간화’ 작업은 유대인은 인간이 아니라는 인종주의적 인식의 극단적인 발로이자 동시에 그 증명을 위해 이루어진 것이고, 때문에 폭력 자체가 목적인 폭력, “쓸모없는 폭력”이었다. 아우슈비츠에서 강제수용자들이 그저 생존하기 위해 동물적 삶으로 전락함과 동시에 잃어버린 어떤 정신적 특성들은 나치가 포로들로부터 탈취한 것이다. 그 잃어버린 것들은 거꾸로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인간성의 징표와 존엄성의 단초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수치심’이다. 작가는 <수치> 장에서 해방의 날에 느꼈던 감정을 묘사한다.
“다시 인간이 되었음을 느낀 순간, 다시 말해 책임감을 느낀 순간에 인간적 고통이 되살아났다.”(82면)”
유기체적인 생존을 위해 동물의 상태로 왜소해져 있던 삶이 다시 인간의 그것으로 돌아왔을 때, 작가는 ‘책임감’을 느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책임감’은 어디서 오는 것이고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일까. 우선 작가는 자신을 비롯한 포로들이 자유를 되찾고 난 후에 공통적으로 느꼈던 ‘수치심’의 근원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다. 그는 이 수치심에 대한 해석 중의 하나로 ‘죄책감’을 거론한다. 이 죄책감은 저항을 감행하고 처형된 소수의 저항자들을 떠올리며 생존자들이 가졌던 감정이다. “당연히 너도 했어야 하는데”라는 말을 누군가 “자신을 향해 내뱉는다고 느끼는 심판”(90면)으로서, 이는 상상된 ‘타인의 시선’의 형태로 파고드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인간적 연대감의 측면에서 실패했다는 자책 또는 비난”(91면)이다. ‘양심의 가책’이라는 인간 내부의 심급, 그리고 ‘연대감’과 같은 심리적 기제들은 분명 문명 사회의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인간이기를 위한’ 여력은 없었고, 라거 내부는 마치 홉스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상태로 표현한 ‘자연상태’와 다름없었기에, 이러한 수치는 그들 내에 잠복되어있다가 해방 이후에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이런 식의 “다른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은 “하나의 상상”, “의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96면)고 선을 그으며 이러한 부끄러움은 피해자에게 주어지는 과도하고 부당한 도덕적 부담임을 적시한다. 그는 “당시의 도덕률에 따라 행한 행동을 오늘날의 도덕률을 바탕으로 판단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 (95면)는 중요한 점을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는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으며,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97면) 혹은 행운이 있었던 사람만이 구조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구조되지 못한 자들이야말로 수용소의 바닥, “최후의 말살” (99면)까지를 목도한 진정한 증인이라고 말한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유명한 격언처럼,. ‘증언의 불가능성’이라는 딜레마인 것이다. 그는 “그들 대신, 대리인으로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99면)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이러한 작업이 말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에 대한 일종의 도덕적 의무감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강렬하고 지속적인 충동 때문에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100면)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절망 속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불씨를 발견하게 된다. 수치로부터 ‘책임지기’라는 윤리적 행위가 출현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것은 앞서 작가가 말했듯이 매우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강렬하고 지속적인 충동”으로서 지속되고, 수행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평생에 걸친 ‘증언’하기로 수행했던 것이다. 공격받고 상처받았을 때 그것을 되돌려주는 것이 동물이라면, 인간은 그 상처로부터 타자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윤리적 전망을 이끌어내고, 그리고 그것의 수행이라는 과제로 스스로를 이행시킬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두번째로, ‘소통능력’, 즉 ‘소통에의 지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zōon politikon)’이며, 말과 이성, 즉 로고스는 정치적 삶인 비오스(bios)를 위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말했다. 작가 역시도 4장 <소통하기>에서 언어를 활용한 인간의 소통능력을 부각한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타인의 평화와 자기 자신의 평화에 기여하는 쉽고도 유용한 방식”(105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라거 내에서 포로들에게 ‘소통’은 허용되지 않았다. 책에서 구분하지는 않지만 엄밀히 말하면 두가지 의미에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매우 비인간적이고 압제적인, 폭력의 위계구도로 짜여진 라거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의 소통은 (압제자-피압제자는 물론이고 포로들끼리도) 불가능했다는 것과, 광적인 인종주의, 민족주의 하에서 언어 장벽이 낳는 소통의 불가능성은 더욱 흉폭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의 4장은 후자에 대한 서술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라거에서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필요충분의 기제” (108면)로서의 언어는 독일어 뿐이었다는 점이다.
라거 내에서 독일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동물적인 ‘음향’을 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곧 강압적인 명령 조차도 통하지 않는, 인간(Mensch)가 아닌 ‘야만인’ 내지는 ‘짐승’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몽둥이질과 고무채찍으로서 다스려졌다. 언어가 다른 이들은 오래 생존하지 못했다.
“그들은 등 뒤를 엄호하려고 본능적으로 구석으로 피신했다. 공격은 사방에서 들어올 수 있었으니까. 그들은 덫에 걸린 동물들처럼 당황한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실제로 그런 동물이 되어있었다.”(114면)
그리고 나치에 의해 언어능력을 상실한 이국의 포로들은 정말로 동물의 상태로 전락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처럼 나치는 이민족의 ‘언어’, 나아가 ‘소통능력’에 대한 박탈과 모독을 자행했다. 독일어, 즉 ‘언어’를 갖지 못한다는 것은 곧 생명의 박탈로 직결되는 것이었던 반면에 독일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생존에 조금이나마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작가 레비 역시 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전자의 의미로서의 소통능력의 박탈에 대해서도 작가는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 즉 이는 독일어를 할 줄 알든 모르든 누구에게나 해당되었던 소통불가능성으로, ‘정치적’ 삶, 즉 상징적 생명의 영역에 대한 박탈이었다. 작가는 같은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려웠고, 그렇게 아무와도 이야기하지 못할때 “말은 말라버리고 말과 함께 생각도 말라버린다”고 말한다.(110면). 또, “말의 소멸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정적 무관심의 도래를 알리는 불길한 징후”(121면)라고 말하고 있다. 소통의 부재로 인해 생각이 앙상해지고, 연대가 아닌 ‘각자도생’의 삶의 방식으로 후퇴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적 무관심’은 마치 자연상태에서의 인간 혹은 동물의 습성과도 같다. 이처럼 라거 내에서 그 누구에게도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결정적으로 라거만의 은어가 보여준다. 라거에서의 언어는 “장소와 시간에 결부된(ort-und-zeitgebunden)”(115면) 것으로서, 생각을 개진하고 나누고 직조하고 소통하기 위한 언어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저 나치즘이라는, 극단적으로 경직된 전체주의 군국주의 체제를 떠받들고 실행하는 기계의 실행버튼과도 같은 것이었다.
세번째, ‘노동에 대한 애정’이다. 이점은 5장 <쓸데없는 폭력>에서 짧게 언급된 것이지만, 중요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늘 하던 일을 다시 하게 되면서, 어느 정도는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노동은 일종의 정신 운동이었고,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었으며, 하루를 살아내는 방법이었다.”(147면)
이 구절에서 작가는 엄혹한 라거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어느정도는 회복시킬 수 있게 했던 것이 바로 노동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그가 했던 흥미로운 관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잘된 일’에 대한 열망이 매우 뿌리 깊다는 것”(148면)이다. 아무리 나치에 의해 강요된 노동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나치에 대한 반감으로 일부러 “사보타주”를 하는 것은 “인간 본연의 내적 저항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 가진 “전문적인 일에 대한 존엄성”과 존중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직업정신’이라는 말도 있듯이, 이것은 인간의 특수한 정신적 기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존엄성을 지킬 수 있게 하는 ‘노동’ 역시 나치에 의해 왜곡되고 의미를 상실한다. 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행해진 노동은 ‘노동력의 착취’나 이윤 창출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포로들에게 최대한의 괴로움, 최대한의 정신적, 도덕적 고통을 짜내”(145면)기 위한, 박해를 위한 것이었다. 라벤스뷔르크의 여자 포로들이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서로의 모래더미를 서로에게 옮기는 노동을 해야 했다는 것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3. 윤리란 무엇인가
라거의 폭력은 인간성과 존엄성에 대한 전방위적이고 총체적인 탈취이자 추악한 공격이었다. 이는 수많은 의문과 회의를 낳는다. 어떻게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이다지도 잔인한 폭력을 가할 수 있었는가? 윤리는 이들에게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SS의 잔학행위 뿐 아니라 책에서 묘사되는 ‘회색지대’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일들을 보며 우리는 도덕적 판단의 불능, 도덕적 사고의 정지 상태에 빠진다.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윤리란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잘못된 체제에서 윤리는 가능한가’라는 질문이다.
권력과 생존은 인간 본연의 욕망이라고 할지라도, 라거의 상황은 그것들을 극단적인 형태로 치닫게 하는 것이었다. 욕망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라거 내는 “전체주의 사회라는 대우주를 재현”하는(53면) “복잡하게 얽히고 계층화된 소우주”(20면)였다. 이 책에서는 포로들을 ‘피해자’라고 단순히 납작하게만 볼 수는 없는 여러가지 인간 군상의 회색지대가 펼쳐진다. 포로 내에서도 프로미넨테, 아인자츠코만도스(Einsatzkommandos), 존더코만도스 (Sonderkommandos), 카포와 같은 일종의 계급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때로는 SS보다 더욱 악랄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편, 처형된 소수의 저항자들, 혹은 산송장이 되어 죽어간 ‘무젤만(Muselmann)’들은 그렇게 ‘인간임’을 고집하며 ‘비인간’의 영역으로 건너간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라거가 객관적으로 ‘인간됨’을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들을 ‘인간성’의 표본에 놓음으로써 ‘성인’의 윤리를 논의하는 것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우리는 그저 ‘생존하고자 했던’ 평범한 인간들의 견지에서 도덕을 말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작가도 이 점을 분명히 거론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평균적이고 임의 추출된 인류의 표본이었다. (…) 그들에게 성인이나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에게서나 기대할 법한 행동을 요구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55면)
우리는 ‘평범한 우리’ 내부에서 일어났던 분열의 양상과 그 원인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곱씹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전체’와 ‘구조’에 대한 고찰은 그 핵심에 놓인다.
“가장 큰 잘못은 시스템에, 곧 전체주의 국가의 구조 자체에 있었음을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한다.”(48면) 무시무시한 부패 권력을 행사하는 지옥 같은 체제로부터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러한 체제는 자신의 희생자들을 타락시키고 그들을 자신과 비슷하게 만든다. 크고 작은 공범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처럼 여러 곳에서 ‘시스템’과 ‘구조’, ‘체제’의 문제를 말한다. 체제 내에서의 저항은 쉽지않고, 라거 내의 권력과의 타협은 궁극적으로는 나치 파시즘의 기형적인 구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판단을 유보”한다.(69면) 레비는 독일인들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들 역시도 일괴암적인(monolithic) 존재가 아니었으며, “평균적 인간이었고, 평균적 지능을 가졌고, 평균적으로 악한 사람들”(251면)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잘못된 교육을 받았던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어서 그는 그들의 대다수는 “정신적 나태함 때문에, 근시안적 타산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국민적 자부심”때문에 그러한 구조를 수용하고 침묵했다는 책임이 있음을 명확히 한다 ‘책임’이라는 것은 결국 그런 구조에 반기를 들고 비판할 수 있게 하는, 구조가 완전히 포섭하지 못하는 인간의 어떤 주체성과 도덕성은 여전히 존재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체제’ 내를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는 바로 그 저항의 단초, 내파(內破)의 계기를 탐구하는 과제가 중요해보인다. 그것은 나쁜 삶을 비집고 출현하는 윤리의 가능성이다. 작가가 “이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매우 단단한 도덕적 뼈대가 필요하다.”(78면)고 말하면서도, 그러한 ‘도덕적 뼈대’에 대한 보충설명이나, 저항과 윤리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고찰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은 그런 점에서 아쉬운 지점이다. 그는 이 지점에서 멈춰선다.
그러나 ‘윤리’의 가능성이라는 긍정적인 전망까지 확보하기에는, 그가 경험한 아우슈비츠는 인류에 대한 완전한 절망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그저 철저히 ‘증언자’의 위치에서 인류가 겪었던, 계몽의 정점에서 일어난 광기와 타락을 목격자로서 후대에게 선연하게 보여주는 역할만을 자임하고 있다. 이렇게 살아남아 ‘증언’하는 것 또한 저항의 한 형태라는 것은, 우리 독자가 메타적으로 읽어내고 의미화 해야하는 것이다.
4. 나가며
레비의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현대의 사회에서 공권력에 의해 라거의 포로들처럼 말 그대로 동물적 상태로 전락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과연 ‘수치심’의 결여, ‘정치적’ 담론의 실종, 존엄성을 찾기 어렵도록 왜곡된 ‘노동’, 이러한 인간 존엄성의 상실은 단지 라거에서만 일어났던 특수한 현상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는가? 현대의 우리는 이러한 질곡을 극복했다고 선언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과연 우리의 시대가 ‘각자도생’이라는 말보다 ‘연대’라는 말이 어울리는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사악함의 심연을 측량하는 것은 쉽지도 않거니와 즐거운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제 저지를 수 있었던 일은 내일 또다시 시도될 수 있고, 언젠가는 나와 우리 아이들이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굴을 찡그리고 머릿속에서 떨쳐버리고 싶은 유혹이 든다. 이것은 우리가 맞서야 하는 유혹이다”(61면)
아우슈비츠 이후 4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레비는 비판적 물음들을 견지하고 있다. 낭만주의적이고 수사적으로 기억을 미화하거나, 이론에 기대어 섣불리 결론지어버리거나 상처를 봉합하는 길을 택하지 않는다. 그것은 참상을 겪은 당사자로서 쉽게 가능하지도 않은 것이었을 터이다. 대신에 그는 잊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인류의 수치스러운 기억을 잊지 말 것을, “우리의 감각을 벼리고 있을 것”을, “타당한 이유들의 밑받침이 없는 “아름다운 말들”을 말하고 쓰는 사람들을 믿지 말 것”(248면)을 주문한다. ‘상처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 ‘비판적’ 감각을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 레비가 보여준 윤리성의 단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만성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며, 그 폭력은 우리의 비판의식이 무뎌질 때 언제든지 다시 고개를 쳐들 수 있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일으킨 전체주의적 체제와 구조는 ‘히틀러’와 같은 얼굴을 가졌다면 현대의 ‘시스템’과 ‘체제’의 얼굴은 점점 저 편으로 멀리 사라져 인식 불가능성의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프리모 레비의 <가라앉은 자, 구조된 자>가 보여주는 인간성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한 비판적 정신의 첨예함은 어느 때보다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곱씹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1]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이소영 역, 돌베개, 2014, p.75. (이하 같은 책 내에서의 인용은 괄호 안에 인용면수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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