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dith Butler,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A Critique of Ethical Violence
1장 자기자신에 대한 설명
p.27
처벌 체계는 인과적 행위주체로서의 주체에게 호소해서는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고통겪기와 상해를 삶이 어느 정도는 수반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p.41
나는 도덕은 자신의 사회적 조건들의 징후나 그 조건들의 초월성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도덕은 차라리 희망의 가능성과 행위성의 결정에 본질적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다.
p.48
어떤 의미에서 나는 너에게 인정을 제공할 떄 인정 규범에 굴복하는데, 이는 “나”는 이런 인정을 나 자신의 사적인 출처에 근거해서 제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인정을 제공하는 순간 규범에 종속되고, 따라서 “나”는 그 규범의 행위성의 도구로 바뀐다. 따라서 “나”는 규범을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바로 그 만큼 항상 규범에 의해 사용되는 것 같다.
p.54
다른 이들은 읽지 못하는데 유독 어떤 한 사람이 나를 “읽을”수 있다면, 이는 나를 읽을 수 있는 이가 다른 이들에게는 없는 내적 능력을 가져서일까? 아니면 어떤 독해 실천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우리가 “능력”이라고 부르는 것을 생산한 어떤 틀과 이미지들과 관련해서 가능해졌기 때문일까?
p.61
나는 단지 특수한 심리적이거나 비판적인 솜씨 덕분에 다른 사람을 인정하는 사람은 없으며 규범이 인정 가능성의 조건이라고 주장해왔지만, 우리는 어떤 이가 다른 이들보다 우리를 더 적절히 인정한다는 느낌을 갖는다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문제이다. 이 차이는 규범이 가변적으로 작동한다는 생각에만 호소에서는 설명될 수 없다. 카바레로는 우리가 들려주어야 하는 독특한 이야기들에서 분명해지는 우리들 각각의 존재의 환원불가능성, 따라서 완전히 집단적인 “우리”와 동일시하려는 모든 노력은 반드시 실패할 우리 모두의 환원불가능성을 옹호한다.
p.64
역설적이지만 바로 이런 나의 삶의 관점의 차단, 이런 방향상실, 이런 사회성 안의 무관심의 심급이 그럼에도 나의 살기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2장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
p.83
우리가 책임감을 갖고 자기를 알게 되는 한 가지 방식이, 판단이 중지할 때 일어나는 어떤 성찰에 의해 촉진된다는 점을 고려하자. 비난, 탄핵, 통렬한 고발은 심판하는 자와 심판당하는 자 사이의 존재론적인 차이를 단언하고, 심지어 자신에게서 다른 이를 재빨리 몰아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비난은 우리가 타자를 인정할 수 없는 사람으로 확립하거나, 그들에게 떠넘긴 뒤 비난하는 우리 자신의 몇몇 국면을 저버리는 방법이 된다.
p.93
그러나 너무 많은 연결은 편집증적 고립의 극단적인 형태를 낳을 수 있다. 삶이 서사 구조를 필요로 한다고 해서, 모든 사건에서 삶 전체가 서사 형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해서, 모든 사건에서 삶 전체가 서사 형식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결과가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결론은 최소한의 심적 안정성에 대한 요구를 분석 작업의 근본적 목적으로 바꾸게 될 것이다.
p.105
삶의 부분성 혹은 편파성과 임시성 떄문에 삶의 서술하는 것의 중요성을 문제 삼을 이유는 전혀 없다. 나는 전이가 내레이션을 촉진시키고, 또 삶을 서술하는 것이 특히 원하지 않았던 불연속성의 경험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들에게 결정적인 기능을 갖는다고 확신한다.
*<프랑스 다이어리>의 응급정신질환자의 깨진 언어.
p.115
그러나 이 죽음, 만약 이것이 죽음이라면, 이 죽음은 어떤 주체, 결코 시작에 동석하지 않은 주체의 죽음, 불가능한 지배의 환상의 죽음, 따라서 우리가 결코 가지지 못했던 것의 상실에 불과하다. 다르게 말한다면 그것은 꼭 필요한 슬픔이다.
p.132
위의 마지막 지적이 시사하는 것은 타자의 우선성에 접근하는 정신분석의 태도에는 삶의 불확실함을 느끼지 못하고 둔감해지게 만드는 도취를 경계하는 윤리적 신중함이 함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p.140
이런 극단적인 자기-학대에서 놀라운 것은 저 도도하고 위풍당당한 개념인 투명한 “자아”일 것이다. 그런 자기-학대에 윤리적 이상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이 바로 투명한 자아 개념이다.
p.141
타자는 서술될 수 없는 것을 증언하고 등록하면서 서사의 실마리를 식별하는 사람으로 기능하지만, 대체로 그가 하는 역할은 비참하게 자학하고 있는 자아가 제공할 수 없는 자아와의 예민한 수용적 관계를 실천으로서의 듣기를 통해 실연하는 사람의 역할이다.
3장 책임감
p.147
상처를 입은 후, 나는 내가 예민하다는 사실, 내가 완전히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방식으로 타자에게 양도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 상처가 입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p. 149
박해란 내가 직접 행한 행위가 근거가 되지 않고서도 일어나는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박해는 우리를 우리의 행위와 선택으로 귀환시키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무의지적 삶의 지대, 나에게 타자가 행하는 일차적인 나를 취임시키는 충돌, 역설적이지만 “나me”로서의 나의 형성, 아니 직접목적어로서의 나의 최초 형성의 도구로서 “나”의 형성에 앞서 나에게 일어나는 충돌로 나를 귀환시킨다.
p.155
나는 나의 행동 때문에 우선적으로 책임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차적이고 뒤집을 수 없는 민감성의 층위에서, 즉 행동이나 선택의 모든 가능성에 선행하는 나의 수동성의 층위에서 확립된 타자와의 관계 때문에 책임감을 갖는다.
p.160
그러나 타자와의 일차적이고 무의지적인 관계는, 우리가 자기를 보존하려는 에고이즘의 목적에 정초한 주의주의와 자극적인 공격 양자를 단념해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한다.
p.175
폭력은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물리적 취약성, 우리가 최종적으로 주체의 이름으로 해소할 수 없는 취약성, 우리가 확고한 경계를 통해 철저히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피부 속의, 양도된, 서로의 손 안의, 서로의 자비를 바라는 존재라는 것을 이해할 방법을 제공할 취약성을 묘사한다.
p.179
우리는 타자가 입히는 상해에서 자신을 구해내려고 하지만, 만약 상해를 막는 데 성공한다면 우리는 비인간적이게 될 것이다.
그런 상해에 맞설 권리를 주장하는 것과 그 주장에 저항하는 것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할 때, 우리는 “인간이 된다.”
p.187
“그리고 이런 동일성에서, 즉 오직 자기자신에게만 참된 것으로 도덕적 요구를 환원시키는 것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에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와 관련된 모든 특수한 원리는 다음과 같은 지점, 즉 당신은 당신이 참된, 즉 의식적이고 투명한 깡패이기에 결국 참된 사람이라는 그런 윤리를 따르는 지점에서 증발하는 게 자연스럽다.”(PMP,161)
*“의식적이고 투명한 깡패” 맘에 드는 표현이다
p.197
“당신은 당신이 사라지거나, 진짜 몸이나 진짜 존재로서의 자신을 파괴할 때에만, 오직 그때에만 진리의 표명의 주체가 될 것이다”(H,179)
*파르헤지아의 조건 – 위험을 감수하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말하기. 신체의 복수적인 표현. 귄두즈..
p.206
이런 형태의 합리성은 다른 합리성들을 폐제할 것이고, 그 결과 우리는 오직 역사적으로 조건지어진 특정한 합리성의 용어들 내부에서만 자신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어쩌면 있었을 수도 있는 다른 방식들, 혹은 아직 있을지 모르는 다른 방식들은 메시지를 전달받지 못하고 열린 채 있게 될 것이다.
p.218
말을 하면서 자신을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사용하는 바로 그 발화로, 자신의 삶을 가능케 한 로고스를 전시 중이기도 하다. 물론 푸코는 말과 행동의 일치를 강조하지만 그것이 유일한 핵심은 아니다. 그것은 말하기가 이미 일종의 행동하기이며, 행동의 형식임을, 이미 도덕적 실천이고 삶의 방식인 그런 형식임을 승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p.228
그가 보기에 책임 윤리는 나의 행동의 “목적과 의도”뿐 아니라, “그 결과로 생기는 세계의 모습”(PMP,172)도 고려한다.
*그레거스 베를레가 놓쳤던 것
p.229
그런 주체성의 양태(새로운 주체성의 양태)들은 우리를 만들어낸 제한적 조건들이 양순하고 복제가능한 것으로 밝혀질 때, 어떤 자아의 이해가능성과 인정가능성이 비인간적인 방식들을 드러내고 그 방식들–이러한 방식들을 통해 계속 “인간”을 행하고 망치는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을 설명하기 위해 위태로워질때, 생산된다.
*두달 넘게 쥐고 끙끙댄 것 같다. 어려웠다.
* 글쓰기 방식.. 처음에는 적응이 잘 안됐는데, 읽을수록 놀라웠다. 글 역시도 수행적으로 쓰는 방식 – 비슷한 논지를 반복 변주하는 것 같다가도 (뜨개질로 말하자면) 갑자기 (그러나 자연스럽게) 새로운 코를 뜨고, 거기에 조금씩 다른 국면을 짜나가는 듯한
*역자 양효실 선생님이 수업때 알려주신 버틀러의 문장을 읽을 때의 팁 – 이해가 안되는 말도 몇 번 반복해서 내뱉다보면 자연스럽게 들린다. (“시간의 지평이 무너진 이들”이라는 표현을 읽다가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시적이고 문학적인 문장들.
*오랫동안 곱씹어야 할 것 같다.
*자기 정초적 주체, 자기 확신의 윤리라는 환상
*불투명성, 오류가능성
*인정가능성과 대체가능성
*읽는 동안 머릿속에 번뜩인 수많은 인서트샷
*마지막 문단이 주는 전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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