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vishai Margalit, “Justifying Respect” in The Decent Society, Cambridge, Mass :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Summary_
이 글은 오직 인간이라는 이유 만으로 인간을 존중해야 할 이유에 대해 정당화하는 세가지 유형의 논변을 검토한다. 적극적, 회의적, 소극적 정당화가 그것이다. 적극적 정당화는 모든 인간이 가진 특성으로부터 존중받을 가치를 갖는 특성을 찾고자 하며, 회의적 정당화는 존중하는 태도에 선행해서 이를 정당화하는 특성 찾기를 포기한다. 소극적 정당화는 인간에게 존중받을 가치를 부여하는 특성 찾기를 포기하고, 인간을 모욕하는 것이 왜 나쁜지 묻는 질문에 집중한다.
먼저, 적극적 정당화 유형에 속하는 대표적인 논변은 종교적인 것이다. 이 경우 존중을 정당화하는 것은 사람들 안에 있는 인간적인 속성이 아니라 신적인 영광의 반사다. 그러나 이러한 논변은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은 설명하지 못하는데, 이에 대해 신적인 것에 비해 그러한 차이들은 무시해도 좋을 만한 것이 된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존중의 태도가 반드시 신의 영광에서 반사된 것으로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인류’라는 종의 성취에서 반사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왜 반드시 인류가 이룬 성취의 영광이 인류에게만 반사되는가, ‘우리’를 묶는 공통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존재한다. 또한 반사된 영광을 더 넓은 범위로 확장해서 다른 방면에서 우리보다 훨씬 더 뛰어난 성취를 거둘 수 있는 다른 생명체를 포함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점 역시 제기된다.이는 인간적으로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 존재가 무엇인지 묻는 도덕적 질문에 적합한 범주가 자연 종이 되는 이유에 대한 물음이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자연의 어떤 성취보다 도덕적으로 관련이 있는 특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존중을 정당화하는 특성이 되려면 1.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존중해야 하므로 등급을 매길 수 있는 특성이 아니어야 하며, 2. 그 특성은 악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야 하고, 3. 인간을 존중하는 일과 도덕적으로 관련이 있는 특성이어야 하고, 4. 존중을 인본주의적으로 정당화하는 특성이어야 한다. 이러한 기준을 바탕으로 마갈릿은 칸트의 이론을 검토한다. 그에 따르면 칸트가 인간에 대한 존중이 정당화되어야 하는 이유로 열거한 특징들은 3번과 4번은 만족시키지만 1번과 2번은 만족시키지 못한다. 칸트의 목록에 있는 특징들은 서열을 나누는 것이어서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존중하는 일을 정당화하지 못하며, 더욱이 악용될 수 있다. 도덕적이 될 능력이 있으면서도 명백히 비도덕적인 삶을 사는 이들을 존중할 이유가 없게 된다. 즉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결정하는 존재라는 사실이 인간을 존중할 이유라고 하지만, 그들이 비열한 목적을 택했을 때는 그것이 그들을 경멸할 이유가 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칸트가 제시한 특징들을 옹호하는 자들은 이에 대해 설령 어떤 특성이 등급을 매길 수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 안에 그런 특성이 존재하기 위한 기반이 있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주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한계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 기반을 넘어서는 것은 개인의 특수성으로, 이는 사회적으로 평가할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칸트가 제시한 특징들이 모든 인간에게 긍정적인 쪽으로만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 그러한 특성들이 악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칸트의 특징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편 버나드 윌리엄스는 인간에 대한 존중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징으로, 모든 인간이 다른 사람의 관점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치를 갖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변 역시 악인들의 존재에 의해 가로막힌다. 이러한 관점은 그들의 관점을 존중해야 할 이유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도덕적 연관성을 갖는지에 대한 반문에 맞닥뜨리게 된다.
칸트는 인간에 대한 존중을 정당화하기 위한 특성의 조건으로 그것은 내재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내재적 가치는 교환불가능성에 기반한다. 칸트의 핵심 주장은 모든 사람이 교환불가능한 내재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적 입장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어떤 끔찍한 상황에서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내재적 가치와 교환불가능성을 운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겁한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칸트가 제시한 특성들은 내재적 제한조건에 부합하는가? 합리성은 한 사람이 똑같은 합리적 형식을 공유한 다른 사람과 교체되는 것을 허용한다. 내재적 가치를 부여하는 특성만이 인간에 인간에 대한 존중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조건을 마갈릿은 자신의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한편 앞선 작업은 능력 특성과 성취 특성을 구분하지 않은 것으로, 이는 둘 다 서열을 나눌 수 있는 특성이다. 둘다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는 것이기 떄문이다. 마갈릿은 인간에 대한 존중을 정당화하는 특성으로 역량을 제안하고 있다. 이는 주어진 순간에 자신의 삶을 재평가하고 그 이후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역량이다. 여기에는 잘못을 뉘우칠 수 있는 능력, 잘못된 방식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한다. 바뀔 수 있는 가능성 만으로 인간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이는 근원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근원적 자유는 어떤 사람의 과거 행동이나 성격, 환경이 그의 미래 행동을 제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전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의미다. 결국 사람들이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 까닭은 인간이 본성을 갖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자유와 존엄성의 관련성에 대한 스키너의 주장은 이를 반박한다. 스키너는 존엄성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유의 개념을 옹호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자유와 자유의 부재는 은밀한 강화와 공공연한 강화라는 차이밖에 없으며 둘 다 강화를 통해 인간의 반응을 조종하는 것은 동일하다. 따라서 자극에 의한 조종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의 존엄성은 그에 의하면 환상에 불과하다. 사람의 행동이 미래에 변화할 가능성이 본인이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강화의 결과라면, 인간의 존엄성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또, 자유롭게 행동할 인간의 능력은 좋은 쪽에서 나쁜 쪽으로의 변화도 포함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회개능력에 관해 계속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왜 사악한 사람들까지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마갈릿은 도덕적인 삶을 살아온 것은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는 추정을 낳지만, 사악한 삶을 살아왔다고 해서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추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적기는 하지만 그가 회개할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적인 인생을 살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미래에 대한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입증된 능력이라는 점에서 존중받을 자격을 주는 반면, 존중은 인간이 자기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추정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 다음으로, 회의적 답변은 인간을 존중할 근거가 되는 특성은 없다고 본다. 대신 인간이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는 믿음을 보인다는 사실에 바탕을 둔다. 인간을 존중하는 태도야말로 인간에게 존중받을 자격을 부여할만한 어떤 인간적 특성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다. 정당화 관계의 순서를 바꾸어놓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우리의 생활양식이 인간을 존중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포함한다면 이는 종교적 견해가 남긴 자취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의 이미지대로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해명해줄지는 몰라도 사람들을 존중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또 다른 비판은 정말로 우리의 생활양식이 사람들에 대한 존중을 보장한다면 그 사회는 모두 전적으로 품위있는 사회가 되며, 따라서 우리는 정당화할 필요성 역시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당화의 필요를 느끼는 것은 많은 사회가 그렇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비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존중하는 행동과 존중의 개념 자체가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구성원에게 모욕적으로 대하는 사회이어도 인간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회의적인 답변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기존의 태도를 바탕으로 존중을 정당화하면 인종차별적 태도까지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 존중받지 못했던 이들은 그 이유만으로 현재에도 존중받을 가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왜 모든 사람이 존중받아야 하는가, 우리는 존중을 인간에게만 한정하고 다른 생명체는 왜 존중하지 않는가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일부 인간에게만 귀속시키는 인종차별적인 태도를 다룰 떄는 특성 인종차별주의와 태도인종차별주의를 구분할 필요가 있는데, 전자는 자신이 속한 특정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만 어떤 특성을 부여하고 그들만이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들은 회의적 정당화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특성이 잘못된 이론에 기반하고 있거나 도덕적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한편 태도 인종차별주의는 모든 사람들이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으면서도 자신이 속하는 집단의 구성원만 존중하는 태도가 자신들의 생활양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그들 집단의 일원만 존중할 정당성을 구성한다.
이를 반박할 방법으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특성 인종차별주의뿐이며, 이것의 근저에는 인간의 존엄성이 모든 사람이 누릴 자격이 있기 떄문에 하지만 태도 인종차별주의는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 존중할 회의적 정당성에 실질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여기서 회의적 정당화를 보완하는 다른 믿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이 어떤 집단에 속하는지와 무관하게 그들을 존중하는 것이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 가장 잘 부합하는 태도라는 믿음이다. 즉 인간의 존엄성을 특정 하위 집단에만 한정하는 인종차별적 태도는 우리가 가진 다른 도덕 판단과 일관되지 못한다. 이런 일관성에 의한 정당화는 인종차별적 시각 뿐 아니라 존중을 다른 생명체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대하려는 입장도 반박할 수 있다.
인간 존엄성의 소극적 정당화는 존중해야 할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 대신에 모욕해서는 안될 정당한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는 인간이 물리적일 뿐 아니라 상징적 의미를 갖는 행동으로 인해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학대는 최고의 악이며, 이를 막는 일은 가장 중요한 도덕적 명령이다. 모욕은 정신적 학대이며, 품위있는 사회는 사회제도 안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학대를 제거해야할 뿐만 아니라 제도가 야기하는 정신적 학대의 근절에도 전념해야 한다. 이때 사람들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다르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데, 필요한 것은 모욕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때의 모욕은 물리적 고통을 동반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학대 행위를 근절하라는 명령에는 모욕의 근절도 포함된다. 인간 존엄성의 소극적, 간접적 정당화는 비모욕의 정당화이며, 인간과 동물을 향한 어떤 학대행위도 잘못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모욕이라는 형태로 취해지는 학대에 고통받는 것은 인간뿐이다. 품위있는 사회는 학대를 근절한 사회이며, 모욕을 포함한 모든 학대를 근절하라는 요구 자체는 어떤 도덕적 정당화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어서 마갈릿은 인간을 (비)인간으로 대한다는 표현의 의미에 대해 고찰한다. 인간을 비인간으로 대하는 것은 인간을 기계로 대하기, 인간을 동물로 대하기, 인간을 인간 이하로 대하기 등이 해당하는데, 인간을 인간 공동체에서 제외하는 방법으로 중요한 또 다른 방법은 개인이나 집단을 인간성을 파괴하는 악마로 대하는 것이다. 마녀사냥, 나치의 유대인 악마화가 한 예다. 악마화가 나쁜 것은 인간 집단에서의 배제와 통제력의 상실이라고 하는 모욕의 두 의미를 분리시킨다. 사회는 외부의 적을 악마화하는 경우가 많다. 품위있는 사회는 외부의 적에 대한 모욕, 예컨대 악마화를 통해 그들을 비인간화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람들을 물건인 것처럼 대하는 것과 그들을 물건으로 다루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이 글은 주장한다. 전자는 그들을 진정으로 물건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렇게 대접할 뿐이다. 후자는 행동을 당하는 사람을 실제로 일종의 물건으로 믿는 것이다. 인간은 사물이고 동물이고 심지어 기계이기도 하지만 그것들에 국한된 존재는 분명 아니다. 그는 이러한 전제 위에서 인간을 말 그대로 물건이나 기계로 바라볼 가능성에 대해 논한다. 일종의 사물처럼 보이는 식물인간의 경우처럼, 한 인간을 그렇게 지각하는, 즉 그에게서 인간적 측면을 자각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적 측면을 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본다는 것은 그 육체가 영혼을 표현한다고 본다는 의미이다. 즉 인간의 육체와 그 부분들을 그것이 비문자적으로 예시하고 있는 정신의 용어로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람을 인간으로 본다는 것은 우리가 그의 육체에서 보게 되는 것을 정신의 단어로서 지각하고 이해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속적으로 인간을 인간이 아닌 것으로 자각하는 일, 즉 인간-맹인 사람들은 인간을 심리적인 기술 아래서 보지 못하고 단지 물리적인 기술 아래에서만 본다. 이들은 인간 존재의 인간적 측면을 직접 지각하지 못하며, 추론을 통해 도출한다. 이러한 인간-맹은 병적 상태로서,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니다.
어떤 그림이나 재현물이 가지는 인간적 측면을 본다는 것은 인간의 육체를 인간적 측면으로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우리가 인간을 다룬 그림을 인간적으로 볼 지라도 정상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그 그림이 가진 비인간적인 측면도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문제는 인간을 말 그대로 짐승으로 보는 것은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시각이 그렇지 않냐는 의견을 반박하며, 정말로 그러한 경우는 찾기 어렵다고 답한다.
따라서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경우는 심각한 병이 아닌 경우 있기 어렵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아예 보지 않기는 쉽다. 이는 손쉬운 일이다. 인간을 간과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즉 이해하지 않고 보기만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꿰뚫어보기, 배경으로 보기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정확히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자발성의 문제라면,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도 자발성의 문제이다. 즉 상대를 자세히 보려는 노력이 기대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상대를 인간 이하로 보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을 낙인 찍힌 존재로 보며, 그들의 물리적인 변칙이 그들의 인간성의 결함에 대한 표시로 본다는 것이다. 낙인 찍힌 자들은 인간 이하로 간주되며, 우리가 상대를 인간으로 보도록 만들어주는 특성들이 이 낙인에 가려질 때, 보는 행위는 그 사람을 인간 이하로 보는 것으로 바뀐다. 결국 모욕하는 시선은 상대를 사물이나 기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로 보는 데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인간 이하로 보는 일이 해석이 아닌 지각의 문제라면, 이것은 통제할 수 없기에 그들을 비난할 수 없지 않을까? 이 난처한 질문에 대해 저자는 보는 일과 해석하는 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인간 행동을 독특한 관점에서 본다. 사람들은 직접 결정하지 않고, 오히려 결정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쏟는다고 보는 것이다. 대부분 습관적으로, 무난한 절차의 틀 속에서 행동하다는 것이다. 즉 인종차별주의적인 사회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피부색-맹인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낙인을 보며, 그들이 보고 인지하는 측면을 보기를 회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을 인간 이하로 보는 것은 습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태도를 의식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할 수 있으며, 인간적 측면에서 사람들을 보도록 훈련될 수 있다.
한편 모욕은 모욕당하는 자의 인간성을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욕은 인간을 비인간으로 치부하여 거부하는 행위이지만, 그 행위 자체가 그 거부의 대상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 즉 거부는 실제로 상대를 사물이나 동물로 믿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런 것처럼 행동하는 데 있다. 헤겔의 주인-노예의 역설처럼, 거부하는 사람은 모욕을 통해 자신의 우월성을 입증하며 인정을 받고자 하기에, 거부당하는 자의 인간성을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거부는 인간을 인간 이하로 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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