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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하버마스, 자연법과 혁명

Natural Law and Revolution, in Theorie und Praxis

Summary_

이 글에서 하버마스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혁명, 그리고 각 혁명이 가져온 인권 선언을 비교 대조하며 근대적 자연법과 시민 혁명 사이의 내적 연관을 살핀다. 이 글에 의하면 프랑스의 인권 선언과 미국의 인권 선언은 비슷한 외양을 가지고 있더라도 다른 이념과 결단에 정초해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비판에 의하면 두 계열의 혁명 모두 부르주아의 정치적 혁명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통된 한계를 가진다. 복지국가가 도래한 현대사회, 기본권의 규범은 자연법상에 토대를 두지만 기능의 변화가 불가피해지며 이와 변증법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먼저, 이 글은 고전적 지연법과 근대적 자연법의 여러 측면을 대조한다. 첫째로, 혁명의 결과와 성격의 차이이다. 고전적 자연법에 의거했을때 기존정권에 대한 폭력적인 항거는 구체제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제기능을 못하는 전통적인 법규범을 부활시키려 할 때만 정당한 것으로 인정된다. 하버마스는 구체제의 권리와 자유를 확인하는 행위였던 명예혁명을 예로 든다. 따라서 고전적 자연법은 혁명적 성격을 띄지 못한다. 반면, 근대적 자연법은, 혁명과 국가를 동일시 한다. 합리적 자연법을 실정법적 국법으로 전이시킴으로써 이러한 혁명은 완성되는데, 이것이 자연법의 실정화이다. 정치적 폭력은 이 과정에서 미래의 새로운 권위가 지닐 정통성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변화를 강행하는 역할을 한다.

두번째로, 고전적 자연법과 근대적 자연법은 그 지향에 있어서 차이를 가진다. 고전적 자연법은 도덕과 정의를 통해 모든 시민의 유덕한 삶을 추구한다. 한편, 근대적 자연법은 사적 선택의 영역 내에서 사인으로서 이기적 행위를 추구하는 것을 허용하는 형식적인 권리의 성격을 가진다. 형식적 권리는 곧 자유의 권리이다. 로크는 자기 보존의 의무로부터 사적 자율성이라는 권리를 도출시킴으로써 형식적 권리를 일종의 사적 소유권으로 보았다.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근대적 자연법의 중요한 특징이 도출되는데, 형식적 법규범과 실제적인 도덕성 사이의 연관이 끊어진 것이다. 근대적 자연법은 자유의 범위 내에서 개인이 스스로의 이익을 쫓을 것을 허용함으로써 시민을 도덕의 굴레로부터 해방시켰다. 대신에 이러한 자유는 물리적 힘의 강요라는 형태로서 유지되기에, 형식적 법규범에 의해 보장되는 사적 자율성의 이면에는 억압과 순종이라는 심리적 동기가 발생한다. 그러나 이렇게 실정법의 권위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제재력이 필요하게 되는데, 자연법의 실정화는 독립적이고 동등한 개인의 자율과 자연법적 규범에 대한 각각의 합리적 통찰에 기반해야 하기에, 실정법의 권위의 정당화라는 과제가 생긴다. ‘사회계약’이라는, 정치 권력을 시민들의 자유 의사에 따라 생겨난 것처럼 묘사하는 당시의 허구적 이념은 이러한 난관을 타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압도적으로 정당한 체제는 개인들의 자율적인 통찰과 동의에 근거해야 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미국의 기본권 선언은 자연법의 실정화라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혁명적인 의미를 가지지만, 엄밀한 의미에서의 근대적 자연법은 미국보다는 프랑스의 시민혁명에 부합한다. 프랑스의 기본권 선언은 통찰과 의지에 대한 입증 요구를 바탕으로, 철학의 정치적 실현이라는 이념을 실현하고자 분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랑스의 인권선언이 철학적 문제에 골몰했다면, 미국의 경우 상식의 문제를 선언하는 것에 불과했다. 식민지인들은 본국 시민들이 가진 권리를 재확인하는 동시에, 모국으로부터 해방을 쟁취하기 위함이 목적이었기에, 혁명에 대한 의식이 부족했던 것이다.

다음 절에서 이 글은 본격적으로 프랑스와 미국의 인권선언의 기저에 놓인 의미를 검토한다. 프랑스와 미국 인권선언은 모두 자연법에 호소해 기본권을 선언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선언 이면에 숨은 의미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대영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이 목적이었던 미국의 경우엔 본국의 간섭에 대한 식민지인들의 공통적인 반감만으로도 독립의 필요성을 납득시킬 수 있었고, 때문에 자연법의 실정화 작업에 있어 철학의 혁명적 역할은 필요치 않았다. 즉 모국에 대한 독립의 명분을 세워주는 데 필요한 법질서의 구축이 문제되었으며, 따라서 이는 사실상 고전적 자연법과의 단절보다는 계승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미국인들에게 필요한 선언은 ‘상식’의 표현을 위한 것이었다. 반면, 프랑스 인권 선언의 경우 구체제의 전복이라는 상황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권리 체계를 의도하며 나왔기에 혁명적인 성격을 가진다. 혁명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한 학자 중 하나였던 아베 시에에스에 의하면 철학은 혁명의 근간을 제시해야 하는 과업을 맡게 되었으며, 따라서 철학자에게는 현실에 적용되어야 하는 진리를 제시하고 설명하고 선언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다. 뿐만 아니라, 이들에게는 국민들의 공공교육이라는 의무 또한 있었다. 이는 여론에 의해 승인된 자연법적 질서이 올바른 체제의 바탕이라는 중농주의의 영향 때문이었다. 즉, 프랑스의 인권 선언은 이론을 환기하고 형성하기 위한 선언이었으며, 때문에 자연법의 실정화는 이 경우 혁명적 과업이었다.

하버마스는 다음 절에서 두 나라의 혁명의 토대가 된 자연법 사상의 시민사회에서의 수용 양상을 보다 자세히 고찰한다. 먼저, 미국의 기본권 선언의 토대가 된 자유주의적 자연법은 로크와 페인에 사상에 빚지고 있다. 당시 미국 식민지인들은 대영 제국 국민이라는 자기 인식 위에서, 영국 시민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재확인받고자 했다. 더군다나 이들은 절대주의와 스토아적 자연법이라는 경험과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이를 재해석할 필요 역시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로크를 전통적 자연법의 맥락으로서 수용했고, 로크를 정확한 사회 질서를 계획하고 건축하는 법칙보다는 오히려 선한 삶과 신중한 행위의 법칙을 제시해 준 사람으로 이해했다. 로크는 생존과 결부된 기본권을 재산권으로 해석함으로써 사유재산의 본원성이 도출되며, 이를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국시민들이 영국에 대항했던 논리이기도 하다. 미국 시민의 적극적인 로크 수용은 국가 개입을 봉쇄해서 사적 자율성을 보호하자는, 극히 제한된 의미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 혁명적 통찰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고 하버마스는 지적한다. 토마스 페인은 ‘미국 혁명’을 정치적 권력을 최대한으로 축소시키는 것을 의도하는 혁명이었다며, 자연법은 자율적으로 기능하는 사회에 내재하는 법칙에 위해 객관적으로 성취된다고 주장했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이것은 사회계약과 사회를 동일시해버린 것이다. 이로부터 인권이 사회에 내재하는 법칙과 동치되자 자연법의 실정화는 혁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게 된다. 자연권이 상업 법칙과 손을 잡게 되며 이는 단지 이해관심에 의해 준수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로크의 이론을 소화했으나, 이는 인권 선언의 제정 당시의 논쟁에서 루소파와 중농주의자 두 입장을 결합시키는 촉매로서 작용했다. 루소 지지자인 크르니에는 인권선언은 사회 성원들의 빠짐없는 참여와 평등함을 보장하는 일반의사의 집약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계약을 부정하는 중농주의자 데므니에는 이는 역시 사회계약을 주장하는 홉스의 입장과 다를 바 없다며 반박했다. 그러나 루소와 홉스 모두 보편적 불신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회적 강제, 절대적 법규범을 확보하는 사회계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은 같지만, 사유권의 양도와 복종에 대한 둘의 의미는 판이하다. 루소의 경우에는 소외가 시민의 도덕적 인격으로 옮겨놓는 것이고, 절대권은 인민에 의한 내적 주권을 의미하는 반면에 홉스에게서 소외는 강제에 대한 복종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데므니에는 홉스의 사상으로부터 민주주의를 정초하기를 거부한다. 중농주의자들의 입장은 로크에 가까웠으나, 이들의 입장은 자유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지점 역시 있었다. 중농주의자는 자연 상태와 사회 상태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으며, 사회는 자연 자체의 일부분이지, 계약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는다. 이들에 의하면 권리와 의무가 암암리에 존재하는 자연적 사회는 토지가 사회적 재생산의 근간이 되며 관습적인 사회로 변모하며, 이 과정에서 토지 소유와 정치적 사회로의 이행이 문제되며 국가 권력의 개입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이들 역시 자연법의 핵을 재산권으로 간주하나, 자유주의자들과 다르게 조화로운 상태는 자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법적 질서를 실정화하는 계몽된 전제 조지에 의해서만 자연적 질서가 생성되고 유지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권과 자유를 정치적 사회의 산물로서 본다는 점에서는 루소와 관점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다수파였던 중농주의자의 입장에 소수파였던 루소 지지자의 입장이 어우러져 정치적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한 인권 선언에 반영되었다.

그러나 중농주의적 아이디어에 입각한 입헌군주론이 불신을 사게 되고 중농주의 이론의 경제적 기초에 균열이 가자, 일반의지 개념이 부상했다. 물론 앞의 인권 선언 역시도 중농주의의 세례를 받았음에도 프랑스의 인권 선언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권리를 규정하고 있었다. 1793년 나온 권리 선언은, 이를 보다 명확히 한다. 루소의 ‘사회체계’와 중농주의자들의 ‘정치적 사회’ 개념은 국가와 사회를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자연권의 제도화, 체계의 전체적인 건축을 뜻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이 선언에서 정립된 자유주의적인 ‘자유권’ 목록은 사회참여의 권리와 결합되어 나타나게 된다. 그 이유는 이 법체제의 기초는 삶의 사회적 전 연관을 정치적 의지 아래에 두기 때문이고, 이는 ‘인민 주권’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난다. 한편, 미국의 자유주의적 자연법은 기본권이 국가보다 먼저 존재하는 상호행위의 법칙에 기초함으로써 국가는 자연권을 시인하는 위임자에 그치게 된 것이다. 두 국가는 국가와 사회와의 관계를 해석하는 시각이 달랐던 것이다.

루소의 이론을 급진화한 것은 그를 지지했던 혁명가들이다. 로베스피에르는 이해관심이 아니라 도덕에 바탕을 두는 혁명원리, 즉 대중에게 도덕감을 환기할 방법을 고민했고, 이는 신앙적 계기의 도입으로 나타났다. 국가의 근거를 신앙적 차원으로 승격시킴으로써 동지애, 혁명의식, 도덕감이 고취되었다. 한편 미국의 페인은 혁명 이념과 도덕을 분리했고, 오직 이해관심을 근본원리로 두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에 제퍼슨 등에 의해 미국에서도 자신들의 독립 혁명을 재해석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이는 자연법의 형식적 해석에 그쳤고, 고전적 자연법과의 명확한 구분짓기에 실패함으로써, 대륙의 혁명적 자기이해와 동일시 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혁명과 인권선언 역시 마르크스의 등장으로 한계를 노정한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입헌국가를 자유주의적 전통과 결부시켜 이해했다. 사유재산을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 상행위가 모든 개인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지 못한다는 점은, 결국 두 혁명 모두 기본적으로는 부르주아 혁명이었으며, 형식적 법규범으로 표현된 보편법은 특정 계급의 특수한 이해를 보호하는 것임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법 앞에서의 자유롭고 평등한 법적 인격만을 보장하는 이러한 혁명을 넘어 인간 해방의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단지 정치적으로만 개혁한 국가의 자연적 근거를 사회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실정화된 자연법은 현대의 복지국가 체제에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기본권의 보장은 법치 국가의 토대인 반면 자연법의 철학적 정당성은 상실되었고, 기본권의 목록을 자유주의적으로 규정할 수 없게 되었으며, 정부의 실천은 규범성을 상실하고 사회과학적 분석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 것이다. 결국 복지 국가에서의 기본권의 규범들은 자연법과 변증법적인 관계를 맺는, 기능에 있어서는 사회 현실의 실체적 맥락에 따라 변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 글은 지나치게 과학화된 현대의 정치에 있어서 자연법 개념을 일소시켜버리는 무규범적인 실증적 태도에 대해 경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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