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ri Yonehara (米原 万里, 1950.4.29 – 2006.5.25)
요네하라 마리는 일본공산당의 간부인 아버지를 따라 1959년 체코로 이주해, 그곳의 소비에트 학교에서 1964년까지 학창시절을 보낸다. 이후 일본에 돌아간 그녀는 30년 후인 1995년, 함께 소비에트 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세 친구들-리차, 아냐, 야스나-을 찾아간다.
프라하의 소녀시대(원제 嘘つきアーニャの真っ赤な真実)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을 피해 동유럽 각지를 전전하며 살아온 부모를 둔 리차가,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자란 주제에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그리스의 푸른 하늘을 그리도 뽐냈던 것처럼, 아버지가 스페인 인민전선 전사 출신이며 본인은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리나는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마요르카섬 해안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눈에 삼삼하다는 듯이 들려주곤 했다. (…) 이때의 내셔널리즘 체험은 내게 이런 걸 가르쳐주었다. 다른 나라, 다른 문화, 다른 나라 사람을 접하고서야 사람은 자기를 자기답게 하고, 타인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 자신과 관련된 조상, 문화를 이끈 자연조건, 그 밖에 다른 여러 가지 것에 갑자기 친근감을 품게 된다고. 이것은 식욕이나 성욕과도 같은 줄에 세울만한, 일종의 자기보전 본능이랄까 자기긍정 본능이 아닐까.(p.113)
‘아니에요. 아버지가 꿈꾸신 공산주의와 당신이 실천한 가짜 공산주의를 같이 두지 마세요! 법적,사회적,경제적 불평등에 모순을 느껴, 당신이 가진 혜택을 모조리 내던지신 분이에요! 당신이 지향한 것은 그 반대였잖아요!’ 하고 마음속에서는 외치고 있었지만 아흔 노인을 상대로 그런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아냐 집에서 돌아오는 길 내내 하지 못한 그 말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났다. 아냐 아버지도 옛날에는 뭐 하나 부족함 없는 유대 상인 집에서 태어나 컸을 텐데, 사회의 모순에 눈떠 비합법적이던 공산주의 운동에 몸을 던진 것이라고. 투옥되고 고문당해 다리까지 잃었다. 어디서부터 그의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했을까. 권력을 쟁취한 후부터인가. 우리 아버지도 만의 하나, 일본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취했다면 아냐 아버지처럼 되셨을까.(p.142)
“당신이 가이드가 되어주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이 나라에 대한 나의 피상적인 견해를 일일이 정정해주시니 말이에요. 이 이상의 안내인이 없을 듯해요. 어쩜 난 이리도 철이 없을까요.” “그만큼 당신은 행복했다는 말이죠.” “확실히, 사회의 변동에 제 운명이 놀아나는 일은 없었어요.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른다면 행복은 저처럼 사물에 통찰이 얕은, 남에 대한 상상력이 부족한 인간을 만들기 쉬운가봐요.” “단순히 경험의 차이겠죠. 인간은 자기의 경험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하니까요. 불행한 경험은 하지 않는 게 좋은 거구요.”(p.146)
이 소비에트 학교 선생님들은 제자의 재능을 발견하면 과장될 정도로 법석을 피우는 버릇이 있다. 너무 좋아서 그 기쁨을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는 듯이, 동료와 반 아이들을 끌어들이는 것이다.(…)다른 이의 재능을 이렇게 사리사욕 없이 축복해주는 넓은 마음, 사람 좋은 성향은 러시아인 특유의 국민성이 아닐까 하고 깨닫게 된 것은 그로부터 4반세기나 지나서다.”서구로 와서 가장 힘들었던 것, 이것만큼은 러시아가 뛰어났다고 절실하게 느낀 게 있어요. 그건 재능에 대한 사고방식의 차이죠. 서구에선 재능이 자기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지만, 러시아에선 모든 이의 재산이랍니다.”(p.180)
“그 무렵은 모든 세상일을 흑백으로 나눌 수 있었어. 지금은 뭐가 희고 뭐가 검은지조차 모호해. 현실은 회색이란 것을 터득하긴 했지만.” 맞장구칠 수 없었다. 그런 일반론 뒤에 숨어 아냐가 자신을 합리화시켜가는 것이 싫었다. (..)
“인류는 곧 단 하나의 문명어로 커뮤니케이션하게 될 거야.”
“아냐, 우리들의 대화가 성립되는 것은, 정도의 차는 있다 한들 서로 영어와 러시아어를 어느 저도 하니까 가능한 거야. 네가 루마니아어로 내가 일본어로 말했다면 의사소통이 가능했을까? 아니, 추상적인 인류의 일원이란 건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도 존재할 수 없어. 모든 사람은 지구상의 구체적인 장소에서 구체적인 시간에 어떤 민족에 속하는 부모에게서 태어나 구체적인 기후조건 아래서 그 나라 언어를 모국어로 삼아 크잖아. 어느 인간에게도 마치 대양의 한 방울처럼 바탕이 되는 문화와 언어가 스며 있어. 또 거기엔 모국의 역사가 얽혀 있고. 그런 것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그런 인간이 있다면 그건 종이쪽처럼 얄팍해보일거야.”(…)
“루마니아인들의 참상에 마음 아프지 않아?”
“그야 마음 아프지. 아프리카에도 아시아에도 남미에도 이보다 훨씬 심한 곳이 많아.” “하지만 루마니아는 네가 자란 곳이잖아.” “그런 좁은 민족주의가 세계를 불행하게 하잖아.” (p. 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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