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odges'woods

low-key life

리처드 로티, 인권, 이성, 감성

Richard Rorty, “Human rights, rationality, and sentimentality”, in On human rights: The Oxford Amnesty Lectures, eds. Stephen Shute and Susan Hurley (New York: Basic Books, 1993), 111-134.

Summary_

로티는 보스니아에서 일어났던 민족말살운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보기에 살인자들이나 강간자들은 자신이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박해하는 자들이 같은 인간이 아니라 이슬람이기 때문에, 즉 유사인류, ‘가짜’인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이런 가짜 인류들을 몰아냄으로써 ‘진짜’인류에 기여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며, 로티는 이러한 자기 인식은 편견과 미신을 청소해내고, ‘완전한 인간성’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도덕철학자들을 닮았다고 이야기한다. 동시에, 로티는 안전하고 풍족한 민주주의 아래에 살고 있는 우리 역시도 그 살인자들에게 대해, 인간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짐승이라고 느낀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인간과 짐승의 구별이라는 방식은 어른과 아이의 구별, 남성과 여성이라는 방식들과 함께 우리가 표준적 인간과 주변적 인간, 비인간을 구별하는데 사용하는 세가지 주된 수단 중 하나이다. 로티는 철학자들이 깃털 없는 양족류라는, 생물학적인 범주로서 인간이 공유하는 특성을 규명함으로써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예컨대 플라톤주의자들은 인간과 동물의 존재론적인 차이를 보여주는 어떤 특별한 성분이 인간이 상호간에 선한 태도를 보여줘야 할 이유이며, 생물학적인 인간이면 누구나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을 가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니체주의자들은 이러한 설명을 거부하며 인간은 비열하고 위험한 종류의 동물이며, 이러한 양도불가능한 인권은 그저 약자가 강자에 대항하기 위한 시도에 불과하다고 응수한다. 로티가 보기에 20세기에 들어서며 이러한 두 입장 간의 논쟁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줄어들고 있으며 대신 그 질문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무엇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바뀌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형성하는 동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근래에 형성된 이러한 인간이해와 함께 나타난 것이 ‘인권문화’이다.

인권문화는 인권 정초주의를 반박한다. 로티의 주장도 이러한 입장에 서 있다. 그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짓는 도덕적 선택에 있어서 합당한 기준은 역사적 부산물, 곧 문화적 사실들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 혹자들은 ‘문화상대주의’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로티는 우리의 인권 문화, 즉 민주주의 아래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을 설명해주는 문화가 다른 문화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함을 말한다. 다만, 이러한 우월함은 인간의 보편적 본성과 결부된 것이 아니다. 로티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도덕을 근거짓는 것으로 추정되어 온 공통적인 인간의 속성인 ‘이성’이었으며, 따라서 이렇게 보편적이고 초문화적인 것을 부정하는 문화 상대주의는 비합리주의와 관계를 맺게된다. 그러나 로티는 반정초주의의 입장에 서면서도 비합리주의자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합리주의, 정초주의는 단지 조리있는 사고를 위한 시도에 불과하다. 한편 그가 하려는 작업은, 어떤 초문화적인 것에 근거해서 인권문화의 우월성을 입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인권문화를 더 자의식있고 위력적인 것으로 만들어가기 위한 것이다.

이어지는 정초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런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서의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지에 관해 철학은 그저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직관들의 개요를 얻어내는 데 그친다. 이 개요의 산출에 일반화 과정이 관여하는데, 이는 우리의 직관을 기초지우기 위해 전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 대한 개괄이기도 하다. 이런 개괄적인 일반화의 형성이 우리의 직관들의 예측가능성을 증진시킴으로써 도덕공동체로 통합시키는 도덕적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의식이 확대된다. 그런데 정초주의 철학자들은 도덕적 직관들의 개요가 갖는 진실성과 무관하게, 그 진실성의 입증이 가능한 더욱 더 상위의 전제로부터 일반화를 추론해내고자 한 것이다. 즉 그들은 그 자체로는 도덕적 직관은 아니지만 도덕적 직관을 교정해줄 수 있는 어떤 지식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로티는 이러한 지식의 존재에 대해 회의한다.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지식은 계몽주의가 묘사한 유토피아를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실용주의자들은 인권 문화의 출현은 이러한 종류의 도덕적 지식의 증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오히려 감상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가능함을, 따라서 정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러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역설한다. 요컨대 도덕적 지식에 호소하는 것의 유용성에 대한 그의 의심은 그 인과적 실효성에 대한 의심이지 그 인식론적 입장에 대한 의심은 아니다.

그러나 로티는 이러한 정초주의 철학자들의 의의에 대해서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보편주의적 유토피아에 대한 예언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이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을 경주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영혼과 보편적 도덕의식의 초월성에 대한 물음을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은 지난 200여년간 확실히 중요성을 상실했고, 인권 정초주의 역시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이렇게 도덕철학의 중요도가 낮아진 것은 인간에게 동물과 다른 특별한 부가적인 성분이 없음을 밝혀낸 다윈의 영향이 크다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진화론의 입장은 영원보다는 장래에, 궁극적인 기준이나 비역사적 본성보다는 어떻게 변화가 초래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새로운 사상들을 선호헀다. 이러한 경향과 함께 인류가 확인한 것은 인간의 유연성, 정치성, 그리고 희망이다. 즉 인간은 힘을 합해 자신의 지적 능력과 용기로써 스스로 되고자 원하였던 바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런 인간상에 대한 새로운 정립은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보다는 ‘후손을 위해 어떤 삶을 준비할 것인가?’와 같은 질문을 묻는 것이 된다.

로티는 합리주의적 정초주의적 철학은 합리성, 그리고 도덕적 의무감을 초문화적 본성으로 상정하고 이들이 감성을 배제했던 것을 지적한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인식할 줄 안다고 답하게 되지만, 로티는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훨씬 더 많이 서로에 대하여 느낄 수 있다고 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이렇게 정초주의를 지양할 수 있는 논변은 감정의 조종과 감정 교육이 보다 효율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은 서로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친숙하게 하여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가짜 인간으로 여기려는 경향을 줄여준다. 감성교육의 목적은 ‘우리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라는 말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주의자들은 자기 자신 외에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소수의 사례들을 일반화시켜 도덕철학의 문제로 삼았고, 타인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감성을 갖춘 더욱 일반적인 인간상에 대해서는 도외시하게 된 것이다. 플라톤은 사람들이 더욱 선한 태도를 갖게 할 방법은 그들이 모두 똑같은 합리성을 가진 존재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에서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는 것은 별로 타인을 잔인하게 대하는 것을 막는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철학자들이 납득시키려 하는 유럽중심적인 인권문화, 즉 인류의 보편적 속성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은, 자신이 어떤 열등한 인류보다 낫다는 의식으로 규정된다. 그들의 가난하고 위태로운 생활을 지탱하는 데는 그들이 어떤 더 ‘열등한’ 종족이 아니라는 긍지밖에 남아있는 것이 없다.

로티는 이렇게 불관용한 이들을 ‘비합리적’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정초주의자들은 이들을 진실과 도덕적 지식을 박탈당한 자들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의 문제점은 우리 ‘착한’ 사람만큼 그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날 행운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차라리 이들은 우리 착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합리적이고 똑똑하며, 편견이 없는 사람들이며, 다만 박탈당한 자들로 여겨야 한다. 이들은 안전과 공감을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안전’이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가 자신들의 자기 존엄성과 자신들의 가치의 자각에 비본질적인 것이라고 여길 만큼 충분히 위험 없는 생활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로티는 인권 문화를 고안한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다른 누구보다도 많이 그러한 생활 조건을 누리고 있음을 지적한다. 안전과 공감은 평화와 경제적 생산성이 서로 수반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로 서로 수반된다. 감정 교육이란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통하지 않는 것이다. 로티는 이성이 아니라 교정된 공감이 기초적인 도덕적 능력이라고 주장하는 아네트 베이어의 주장을 지지한다. 베이어는 기초적인 도덕 관념으로서 의무보다는 신뢰를 제시했고, 이러한 관점으로 인권문화의 확산을 시도하는 사고는 인식의 확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감정의 진보”를 의미한다. 감정의 진보는, 우리와 매우 다른 이들 간의 차이보다는 유사성을 중시할 수 있는 능력 속에 존재하며, 이 유사성은 보편적이고 심층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아주 작고 피상적인 유사성이다.

감정이 이끄는 바에 의지한다는 것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도덕법에의 복종이 아니라 단지 선량한 마음의 이끌림에 따라 타인에 대한 억압 또는 억압적 태도를 거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로티는 그러나 품위있는 사회에 대한 희망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시혜적인 감정의 유연화에 달리는 것을 거부하다. 그는 아래에서부터 위로 분출하는 도덕적 진보를 선호한다. 그러나 이러한 선호가 감정이 인간이 가진 최상의 무기라는 생각에 대해 거부감을 만들어내는데, 로티는 이를 니체의 통찰에 기대어 설명한다. 우리는 혐오감 때문에 저항하게 된다는것이다. 우리는 강자가 그렇게 행하지 않을 때 그들을 상처 입힐 강하고 유력한 힘을 바라는데, 이는 정초주의자들의 기획의 기저에 일종의 혐오감이 깔린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니체의 통찰에 동의한다고 해도, 계몽주의를 전적으로 부인하거나 니체주의자들처럼 냉소적이고 염세적일 필요도 없다고 로티는 지적한다.

니체 역시 기독교나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를 인간성 퇴보의 상징으로 본 것은 절대 옳지 않기 때문이며, 그 역시 칸트와 비슷하게 어떤 ‘건조함’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의 표현에 따르면 이것은 ‘남근-로고스 중심주의’이며, 심약하고 감정적이고 여성적인 습성을 버릴 때만 얻어질 수 있다고 믿어지는 ‘순수함’에 대한 갈망이다. 그러나 로티는 또한 칸트의 세계시민주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는데, 이는 모든 인간을 우리의 구성원으로 인정하려는 희망적인 시도라는 것이다. 다만 엄격한 합리성을 추구한 칸트의 작업이 종교적 배타주의에 대한 유일하게 가능한 응답이라고 여겨졌던 지적 시대의 기대를 이제는 극복할 시대라고 로티는 말한다. 이제 우리는 합리주의와 도덕주의의 본성을 깊이 이해하려는 시도보다는 슬프고 감정적인 이야기를 듣고서 반응하는, 감정의 진보를 추구해야 하며, 지난 두 세기는 그러한 진보가 놀라운 속도로 이루어진 시대이다. 우리는 인권문화 현상이 세계적 사실이 된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