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urnal de deuil

10.27
누군가 죽으면,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세워지는 앞날의 계획들(새로운 가구 등등):미래에 대한 광적인 집착.
거대하고 긴 슬픔의 성대한 시작인 이 모든 것들.
10.29
애도의 한도에 대하여.
(라루스 백과사전, 메멘토):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18개월이 넘으면 안 된다.
11.11
견딜 수 없었던 하루. 점점 비참해지는 날들. 울다.
11.21
(..)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지는 또 하나의 괴로움이 있다: 나는 아직도 ‘더 많이 망가져있지 못하다’라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괴로움. 나의 괴로움은 그러니까 이 편견에서 오는 것인지 모른다.
11.29
나는 그 주체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 나의 슬픔이 수렴되는 것, 일반화되는 것(키르케고르)*을 나는 참을 수 없다. 그건 마치 사람들이 나의 슬픔을 훔쳐가버리는 것 같아서다.
12.8
지금 나는 극도로 긴장한 채, 잔뜩 웅크린 채, 그 어떤 ‘살아가는 의미’가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1.8
모든 것이 ‘아주 잘 풀려간다’ – 그런데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롭다.(‘버림받은 사람’처럼).
1.16
다른 사람들, 그들이 보여주는 생의 의지, 그들의 세계를 나는 견뎌낼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리 있어야 한다는, 숨어 지내야 한다는 결심이 자꾸만 강해진다.
1978.3.2.
마망의 슬픔을 견뎌내게 하는 무엇. 그것은 일종의 자유의 향유와 같은 것을 닮았다.
1978.3.25.
어젯밤 마망의 죽음에 대한 악몽. 울고 또 울다가 나는 마침내 완전히 파헤쳐진 빈 구덩이가 된다.
1978.4.2.
내가 더 잃어버릴 것이 무엇인가. 지금 이렇게 내 삶의 이유를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 그러니까 누군가의 삶을 걱정스러워한다는 그 살아가는 이유를.
1978.4.3.
절망: 이 단어는 너무 연극적이다. 언어의 영역 안에 있다.
돌멩이 하나.
1978.5.25.
마망이 살아 있던 동안 내내 나는 그녀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렸다. 그게 나의 노이로제였다.
그런데 지금 (애도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 바로 이 사실인데) 나의 애도는 말하자면 노이로제가 아닌 단 하나 나의 부분이다:이건 어쩌면 마망이 떠나가면서, 마지막 선물처럼, 나의 가장 나쁜 부분, 나의 노이로제를 함께 가져가버렸기 떄문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언젠가 잃을 사람들’로 보는 나쁜 습관.
1978.5.31.
나는 분석적 의미에서의 ‘작업’(애도 작업, 꿈 작업)을 진정한 ‘작업’으로 완전히 바꾸려고 하고 있다 – 글쓰기 작업.
그 이유는 :
(사람들이 말하듯) 커다란 생의 위기(사랑, 애도)를 이겨내고자 하는 ‘작업’은 너무 급하게 끝나서는 안 된다. 그런 작업은 나의 경우 글쓰기를 통해서만, 또 글쓰기 안에서만 비로소 완결될 수 있는 것이다.
(6.15)
그녀가 죽자마자 세상은 나를 마비시킨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 거야, 라는 원칙으로.
6.16
늘 똑같은 의견이 있다: 애도의 슬픔은 점점 익어가는 것이라는 생각(말하자면, 시간이 다 차면 저절로 떨어지는 과일처럼 혹은 스스로 터지는 종기처럼).
그러나 내 경우 애도의 슬픔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그런 것이다. 그 어떤 진행의 과정도 거기에는 없다: 때문에 너무 이른 애도의 슬픔 같은 것도 없다.
1978.7.18.
-누구나 자기만이 알고 있는 아픔의 리듬이 있다.
1978.7.31.
무거운 마음 안에서 살아가는 일, 그 밖에 내가 바라는 건 아무 것도 없다.
1978.8.1.
애도,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선은 급성의 나르시시즘이 뒤를 잇는다:일단은 병으로부터, 간호로부터 벗어나게 되니까. 하지만 그 자유로움은 차츰 빛이 바래고 절망감이 점점 확산되다가, 나르시시즘은 사라지고 가엾은 에고이즘, 너그러움이 없어진 에고이즘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1978.10.6.
(..) 죽는다는 것, 그건 다름 아닌 마망이 치렀던 일 아닌가(그래서 나도 죽으면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마음이 놓이는 환영). – 내 두려움의 진실은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나는 지금 위니코트의 정신병 환자처럼 이미 전에 일어났던 재앙을 두려워하고 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 주는 미묘한 안도감
1979.9.1.
위르트에 갈 때마다 그만두지 못하는 상징적인 습관이 있다. 도착하거나 떠나오기 전에, 마망의 무덤을 찾아간다. 하지만 막상 무덤 앞에 서면 나는 뭘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기도? 그게 뭘까? 뭘 위한 걸까? 그저 잠깐 동안 해보이는 일체감의 시늉일 뿐, 결국 금방 다시 그녀의 무덤을 떠나고 만다.
1979.9.15.
슬프기만 한 수많은 아침들…….
*완전한 혼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 – 언젠가 끝날 것이다.
*나의 우울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 맥빠지면서도 위안이 된다.
*끝날 수 있는 애도는 있을 수 없음을, 집어삼켜 소화시킬 수 있는 타자의 얼굴은 있을 수 없음을.
상처와 슬픔과 함께 사는 생의 실천으로서의 애도, 애도의 마지막 작업으로 죽음을 놓은듯한 바르트. 그의 죽음 자체가 애도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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