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딘가에 무엇인가가 꼭 있을 것이다, 라고 아이들은 유리 항아리를 발음하며 느껴보는 것이다. 예전에 들었던 기억 속 음악이 없는 게 아니라 있었다는 거기서 새로이 힘을 얻듯 언어가 곧 형상이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나는 조금 힘을 얻는 기분이 든다. (p.18)
그 친구는 희망적인 얘기를 많이 했다. 몸도 건강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 친구의 마음에 따라가지지 않았다. 곧 슬프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어떤가, 나 역시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따로 떼어내어 말할 필요조차 없이 그들과 한 덩어리일 것이다. 단지 친구들이 보기에 어딘가 좀 불편하고 이상하게 비칠 수도 있을 것이다. 저 친구는 왜 늘 저렇게 어정쩡하고 자기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가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반면 나는 친구들의 솔직한 얘기에 언제나 속으로 놀라며 미안한 마음을 갖는다. 나의 얘기는 어디로 실종되었을까. 그것도 봉인해놓은 것일까. 내가 늘 카페에 나가 앉아 있고 싶어하는 것은, 실은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는 게 아닐까. 나는 정말로 얘기가 하고 싶은 게 아닐까.
친구들이 보여주는 이 공통된 느낌, 물론 그것은 인생이 후려친 자국, 손상의 느낌일 것이다. 나와 친구들의 뇌는 조금씩 표시 안 나게 쇠퇴하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닌 특별한 느낌이 거기에는 덧붙여져 있었다. (p. 21)
“내가 이즈음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한없이 기다려야 한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지 이상해요. 내가 지금 무얼 하고 있나 하고 보면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예요. 무엇인가의 차례를 기다리고 무엇인가의 답을 기다려요. 답이 그냥 빠르게 돌아오는 법이 없어요. (..) 꾹꾹 눌러 참으며 무엇을 눌러 참고 있는지도 잘 모르며······. 그러나 그저 어정쩡하게 날들이 흘러가지요. 관공서든 회사든 친구든 그 어디든 알아보고 소식을 주겠다 해놓고는. 지금 사회 전체가 그런 풍조인 거 같아요.”(p.24)
차가 너무 커서인가 길은 더욱 어두컴컴하고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목격했다는 두려움이 인다. 뜻 아니한 장소에서 삶의 현장을 투시한 듯한, 혹은 생의 이면을 보고 말았다는 그런 두려움이다. 단순히 이 장면으로 그치지 않는, 삶의 어느 부분과 중요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든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주차장의 차들이 꼼짝없이 갇혔던 이유를 본 것 뿐이다. 그 이유가 너무 명백하고 간단해서 오히려 이상하다. 1+1=2 정도의 너무 쉬운 수학 문제와도 같다. 즉 여기를 막았기 때문에 거기가 그렇게 막힌 것이었다. 오직 그것이었다.(p.26)
이순신 장군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솟아 있는데 그것은 내가 밑에서 올려다보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달무리 낀 달이 장군의 머리 위에 걸려 있다. 이 푯돌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어딘가에 무엇이 꼭 있으리라는 그런 바람의 형상이다. 의식하든 못하든 사람들은 이런 푯돌을 늘 바라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 동창이 갖고 있던 ‘리순신’이라는 프린트물도 그런 일환이리라. 내가 「영웅」심포니를 다시 듣기를 그렇게 원했던 것도. (…)
태어나면 살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기보다 이미 남이 만들어놓은 세상에서 주도권을 무엇인가에 넘겨준 채 살아왔다. 무엇인가를 알아차릴 사이도 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어딘가에 꿰어져······. (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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